릴리스 페어
◈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그리고 대지가 창조되었다. 신은
이 아름다운 대지를 다스릴 존재를 원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아담과 릴리스였다. 신의 의지를 계승한 인간이 지상에서
행한 최초의 사업은 반란이었다. 릴리스의 반란! 아담과
같은 흙에서 동등하게 창조된 릴리스는 억울하게도 아담에
의해 통치되기를 강요당하였다. 동등하게 태어난 자로서
누려야 할 마땅한 권리를 누리지 못한 채 복속되기를
강요당했던 한 개체의 반란은, 인간이 행한 최초의
사업이었다. 하지만 릴리스는 패하였고, 에덴을 떠났다.
그리고 신은 다시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 이브를 낳았다.
아담의 부속품으로 살아갈 운명을 쥐어준 채…. 그 후
에덴을 떠난 릴리스는 에덴의 사람들을 공격하는 복수의
악령이 되었다고 한다. 동등하게 누려야 할 행복을 박탈당한
설움을 곱씹으며…..
이 이야기는 역사상의 모든 이야기를 지배해온 남성들이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다. 여기서 릴리스는 복수심에 불타는
‘악녀’의 한 표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 부정성으로 인해
성서에도 실리지 못한 태초의 인간. 하지만 릴리스는 그러한
표상은 결코 아닐 것이다. 릴리스야말로 이 대지에 태어난
자로서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자신의
가치를 존중할 줄 알며, 자존을 위해 싸울 줄 알았던 최초의
성찰적 인격체이었던 것은 아닐까?. 아무런 반성없이 신의
의지에만 복속된 아담의 질서에 맞서 자신의 권리와 행복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그 의지…. 지금 세상의 절반을 통해
면면히 이어져 오는 그 의지야말로 릴리스가 진정으로
표상하는 가치가 아닐까? ‘동등’한 것과는 멀고, 그저 ‘동일’하기만
한 이 세상의 질서 속에서 릴리스의 의지는 끊임없이
분출되어야 할 생명수이다. 그리고 우리는 1997년의 한
여름에 그 생명수가 가득찬 오아시스의 신기루를 본다. 「Lilith
Fair – A Celebration Of Woman In Music -」의 훈훈한 축제의 마당이
바로 그곳이다.
릴리스 페어는 1997년부터 시작되어 1999년에 이르기까지 3년여에
걸쳐 미 대륙의 여름을 뜨겁게 달구는 음악 페스티벌로서,
캐나다의 한 여성 뮤지션인 사라 맥라클란의 주도아래
펼쳐지고 있다. 주위의 우려를 보란 듯이 불식시키며 97년
이래로 승승장구를 거듭하고 있는 릴리스 페어는 순수하게
여성뮤지션만이 참가하는 페스티발로서, 같은 시기 개최된
그 어떤 음악행사보다 소중한 의미를 가진 행사일 것이다.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는 소외의 지점에 선 여성뮤지션들이
주체가 되어 자신들의 감성과 열정을 표출하고 함께 나누는
공감의 자리가 바로 릴리스 페어이고, 이것은 더 이상
축제의 의미를 간직하지 못한 채 상업전략의 산물로
전락해버린
모습이다. 단순히 ‘절반의 반란’이라는 수동적인 의의에
안주하지 않고, 온전한 한 개체로서의 여성성을 뽐내고
즐기는 자리로서 기억되기를 바라는 릴리스 페어의 취지는
확실히 무언가 다른 공간을 형성하는 듯 하다. 저 태고의
릴리스가 그랬듯이….
릴리스 페어를 거쳐간 뮤지션들의 면면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인다. 저 유명한 셰릴 크로우나 카디건스,
수잔 베가, 트레이시 채프만에서부터 테벳의 한
무명가수까지 포크와 인디-락 씬을 중심으로 모여든 수많은
여성 뮤지션들은 라이브 자체의 순수한 밀착성과 자연스레
형성된 연대의식을 통해 축제를 채워나갔다. 넓은 초원에
옹기종기 모여 도시락 까먹으며 도란도란 노니는 여성들의
모습만으로도 너무나 포근한 한 폭의 그림으로 남는, 이
축제를 보고 있노라면 그저 부러움에 휩싸일 뿐이다. 사전에
철저히 준비된 공연의 구성과 진행상의 매끄러움도 릴리스
페어를 단순히 ‘모인다는 것’으로 만족하는 일회성 사업이
아니라, 진정으로 놀고 즐길 수 있는 공동체의 장으로서
자리매김하게 한다. 반란이었으되 폭력이 아니라, 공명하는
모습… 릴리스 페어가 감동적인 건 이런 이유 때문인 듯
싶다. 그치만 서구의 여성들은 곁에서 누리는 이 풍요로운
축제를 멀리서 엿들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좀 안타깝네 그려.
그러나 국내에서도 「월경페스티발」이나「여악여락」과
같은 행사를 통해 여성들을 위한 어울림의 공간을
형성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활성화되기 시작하고 있으니,
기대를 갖고 지켜보고자 한다.
◈ 릴리스 페어는 작은 다툼을 원인으로 시작된다. 그것은
사라 맥라클란이라는 캐나다 출신 싱어-송 라이터와 한 공연
프로모터와의 사이에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사라가 자신의
공연의 오프닝으로서 폴라 콜(Paula Cole)이라는 한
여성뮤지션만을 세우려 한데서 발단이 되었다. 이 결정에
대해 당시 그녀 공연을 맡았던 프로모터는 ‘여자만 나오는
공연을 누가 보러 오겠느냐’며 다른 출연진을 세울 것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런 부당한 경험을 겪으며 화가 난
사라는 ‘왜 여자들만 출연하는 공연이 성공할 수 없나?’라는
오기가 생겨나게 되었고, 이러한 그녀의 오기는 여성들만의
잔치인 릴리스 페어로 이어지게 된다. 흔히 생각되기로
여성은 큰 일을 해낼 재간이 없다고 여겨지곤 한다. 하지만
이 커다란 축제를 성공으로 이끌어낸 사라 맥라클린은
온몸으로 그러한 선입견이 잘못된 것임을 입증한다. 그리고
97년 그녀의 네 번째 앨범 『Surfacing』을 통해 그녀는 90년대
후반 가장 도드라진 여성 뮤지션 중의 하나로 기록되기에
이른다. 아니, 그녀에겐 뮤지션쉽(musicianship)을 넘어서
우리에게 새로운 가능성의 공간을 사사해준 ‘삶의 교사’라는
이름이 더 어울릴 지도 모를 일이다. 세월의 때가 없는
그녀의 목소리를 떠올려 보면 더욱더….
사라의 음악을 접할 때면 항상 성스러움을 느낀다. 그녀가
그려내는 음의 향연에는 아득한 태고의 향기가 묻어있는 듯
하다. ‘혹시 그녀는 릴리스의 아바타(avatar: 화신)가 아닐까?’
이런 쓸데없는 상상에도 그녀의 음악이 호기로운 것은
도저히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은 고결함과 듣는 이의 긴장을
녹여내는 훈훈함이 조화롭게 숨쉬기 때문일 것이다. 신화
속의 여신이 재림한 듯한 그녀의 아우라는 심심한 온기의 첫
느낌과 함께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는 쓸쓸함이 교차하는
기묘한 것이다. 아직 『Surfacing』앨범 밖에는 들어보지
못했지만, 이 하나의 작품으로도 그녀는 나를 매혹시키기엔
충분했다.
노래를 통해, 포크의 감성을 토대로 가스펠, 뉴에이지 등의
다양한 영역을 뒤섞은 앨범의 곡들은 아주 성스럽고
애수어린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었다. 그래미 석권과
네 곡의 톱 10 싱글, 엄청난 판매고라는 성적보다 더 큰 무엇,
그야말로 ‘감상’의 즐거움을 제대로 느끼게 해 줄 음악을
담고 있는 이 음반은 내게 그 하나로 족하다.
캐나다의 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사라는 벌써 데뷔 10년이
넘은 경력을 가진 중견 뮤지션이다. 뭐, 이제는 거물이라고
해야할까? 릴리스 페어의 후광이 있으니…. 하지만
그녀에게선 거물이라는 느낌보다는 멋진 작은언니와 같은
느낌이 더 크다. 후배들과 선배들 사이에서 든든하게 자신의
몫을 다해주는 작은언니…. 그런 그녀에겐 그녀 스스로
영혼의 어머니라 부르는 쥬디 제임스(Judy James)라는
보석공예가와의 만남이 커다란 힘이 되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지저분한 외모로 인해 ‘메두사’라고 놀림 받던 소심한
그녀에게 용기를 주고 친구가 되어준 쥬디 제임스의
후광이야말로 진정한 그녀만의 출발점이지 않았을까?
상상해보면 꽤나 멋진 광경이 떠오른다. 고즈넉한 공작실의
한켠에서 피아노를 치며 열심히 노래를 부르는 사라…그리고
그녀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백발의 여인…. 서로에게 작은
기쁨이 되어주고, 서로를 포옹하는 이 작은 ‘만남’들로서
여성의 역사는 아름답게 흐르는 것 아닐까? 억압의 질서를
대물림하는 한 쪽과 애정의 반(反)-질서를 대물림하는 또 한
쪽…. 그리고 그 어느 쪽에도 정착하지 못한 방랑자들….
이제 구획들을 뛰어넘어 서로의 뒤섞이고 범벅이 되어야
하는 때가 온 것은 아닐까? 그럼으로써 방랑자들도 자기만의
보금자리를 얻어 편히 쉴 수 있게 될 그러한 때가 말이다.
지금 또 다른 ‘침범’을 꿈꾸고 있을 지도 모를 세상의 모든
릴리스들을 난 지지한다!
– Lilith Fair는 Arista 레코드를 통해 그 실황의 일부가
음반으로 발매되어 있고, 관련 사이트는 www.lilithfair.com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