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조영 집단의 영주사거와 발해의 건국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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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祚榮 集團의 營州 徙居와 渤海의 건국 과정     집필자  boolingoo (2006-12-22 19:09)


머리말 
1. 寶臧王의 謀叛와 고구려 유민의 강제 이주 
2. 大祚榮 集團의 營州 徙居    
3. 李盡忠의 亂과 安東都護府
4. 大祚榮 集團의 動向
맺음말                                    


  머리말


  발해는 고구려 유민이 말갈족을 포섭하여 고구려 옛땅에 세운 나라로서 대외적으로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였다. 또한 발해가 멸망한 이후에는 적지 않은 유민이 고려에 내투하고 고려는 이들을 동족으로 대우함으로써 한민족 형성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한국사에서 발해사를 강조하여 三國時代에 뒤이은 南北國時代를 설정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발해를 고구려보다 말갈족이 중심을 이룬 국가로서 당대 지방민족정권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러시아도 발해를 말갈계 국가로 규정하고 있지만 오히려 러시아 극동의 소수민족의 역사로 파악하고 있다. 요컨대 발해사의 귀속 문제를 놓고 남북한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는 전혀 다른 입장에 서 있는 것이다.


  발해사의 귀속 문제에 대한 시각차는 각국이 처한 현재적 입장의 반영물이기도 하지만, 건국 시조 大祚榮의 出自에 대한 해석상의 논란에서 기인하는 바도 적지 않다. 주지하듯이 발해사의 기본 사료인 구당서와 신당서 열전에서는 대조영의 출자를 高麗別種 또는 粟末靺鞨로 상이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건국 시조의 출자를 그 나라의 종족 계통 나아가 귀속 문제와 무매개적으로 결부시키는 것은 적지 않은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발해사 연구에서 시급한 것은 우선 사실의 복원, 즉 발해사의 구체적인 전개 과정을 밝혀내는 것이다.


  근래에는 이런 입장에서 대조영의 출자에서 한걸음 나아가 건국집단의 실체와 건국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가 이루어졌다.1) 그런데 이러한 연구는 발해의 건국집단에는 고구려 유민뿐 아니라 말갈족도 포함되지만, 건국과정에서는 고구려 유민이 주도적이었음을 밝히는 데 주력하였다. 한편 고구려 멸망 이후 당의 동북 방면을 통치했던 안동도호부의 추이는 발해 건국의 대외적 조건을 이해하는 데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종래에는 고구려유민의 반당투쟁 및 나당전쟁과 관련하여 676?677년 안동도호부의 요동 퇴각까지만 논의가 이루어졌고, 발해와 관련해서는 696년 李盡忠의 亂 이후부터 초점을 두었다. 그 결과 고구려 멸망에서 발해 건국에 이르는 과정이 계기적으로 파악되지 못하였다.


  이 점에서 나당전쟁의 종전과 안동도호부의 요동 퇴각 이후 발생한 고구려 유민의 반당투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발해 건국 관련 기사로서 종래 그다지 주목되지 않았던 신라측 기록에는 이와 관련하여 대조영과 걸사비우를 비롯한 발해의 건국집단이 營州로 이주하였음을 전하기 때문이다. 





1. 寶臧王의 謀叛과 고구려 유민의 강제 이주 


  고구려 멸망 이후 당의 지배정책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당은 5部 176城으로 이루어진 고구려 영역을 강제로 9都督府 42州 100縣의 羈?州로 재편하고, 현지 유력자를 都督?刺史?縣令 등에 임명하는 한편 당 관리로 하여금 이들을 통제하도록 하였다. 安東都護府는 이를 총괄하는 기구로서 설치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고구려 유민의 반발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669년 5월 內地로 3만여戶를 대규모 강제 이주시켰다. 당은 고구려 고지에 대해 領域化를 전제로 하는 羈?支配를 시도하였던 것이다.2)


  그러나 이러한 지배정책은 곧바로 고구려 유민의 반당투쟁을 초래하였고, 여기에 百濟 故地를 둘러싸고 당과 대립하던 신라가 고구려 유민을 후원함으로써 羅唐戰爭이 발발하였다. 나당전쟁의 패배로 당은 安東都護府를 676년 2월 平壤에서 遼東城으로, 뒤이어 677년 2월에는 新城으로 옮겼다. 이를 전후하여 唐 官吏를 철수시켰고, 寶臧王을 遼東都督으로 임명하여 요동 지역을 다스리게 하였다. 이로써 안동도호부는 관할범위가 요동 지역으로 축소되었을 뿐 아니라, 지배방식도 간접통치로서의 기미지배로 전환되었다.  


  종래 대조영을 비롯한 발해의 건국집단이 營州에 거주하게 된 시점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기록들이 단지 고구려 멸망 이후라고만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3) 기존의 연구에서도 대체로 고구려 멸망 직후 행해진 669년의 강제 이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때 당의 방침은 이들을 萊州(山東省 蓬萊市)와 營州(遼寧省 朝陽市)를 경유하여 長江?淮河 이남(江西省 일대) 및 長安 이서의 여러 州(甘肅省?靑海省 일대), 즉 당의 서부와 남부의 변경지대로 옮기는 것이었다.4)


  따라서 만약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이었다면 어떻게 영주에 30년간 거주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 의문이 든다. 더구나 영주는 契丹族이나 靺鞨族이 羈?州의 형태로 집단적으로 거주하던 지역이었다. 또 대조영 집단과 걸사비우 집단만이 이진충의 난을 계기로 독자 세력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도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점들은 어쩌면 대조영의 출자에 대한 상반된 기록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할 지도 모른다.


  여기서 677년 당이 寶臧王과 함께 요동지역으로 귀환시킨 고구려 유민이 당의 여러 州에 머물렀던 사실이 주목된다.5) 669년 5월 강제 이주된 고구려 유민이 영주와 내주를 거쳐 당의 서부와 남부의 변경지대로 강제 이주되기에는 상당한 시일이 경과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669년 이후 내지로 이동중에 다시 보장왕과 함께 요동으로 귀환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677년 보장왕의 요동 귀환은 나당전쟁의 패배 이후 요동지역만이라도 기미지배를 통해 안정시키려는 데 있었다. 그러나 당 내지로 강제 이주시켰던 고구려 유민을 다시 요동으로 집결시키는 것은 상당한 위험이 수반되는 것이었다. 안동도호부를 新城으로 옮긴 것도 이때문이었다. 더구나 신성은 동북 방면의 군사적 요충지이므로, 요동 지역의 고구려 유민과 말갈의 접촉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당으로서는 이곳을 통제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6) 또한 같은 해 男生을 안동도호부에 파견한 것도 이들을 견제하려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7)


  그러나 이러한 당의 시도는 다시 한번 위기를 맞이하였다. 바로 안동도호부를 위해 고구려 유민을 무마해야 할 보장왕이 말갈과 모반을 꾀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고구려 유민의 강제 이주가 실시되었다.





가-① 儀鳳(676~679)년간에 高宗이 高藏을 開府儀同三司?遼東都督으로 제수하고 朝鮮王에 봉하여 安東에 거주하며 고구려 유민을 鎭撫하는 일을 주로 담당케 하였다. 高藏이 安東에 이르러 몰래 靺鞨과 통하여 반란을 도모하였다. 일이 발각되자 (보장왕은) 소환되어 ?州로 유배갔다. 그리고 관련자들을 나누어 옮기되 河南??右 등 여러 주로 흩어 보내고, 빈약자들만 안동도호부 근처에 머물게 하였다.8)


   ② (寶藏)王이 반란을 도모하여 몰래 말갈과 통하자, 開耀 원년(681) ?州로 소환되었다가 永淳(682~683)初에 사망하였다. 衛尉卿을 추증하고 조서를 내려 장안으로 (운구를) 송환하였다.9)





  사료 가-①에서는 요동도독으로 임명된 보장왕이 말갈과 고구려 부흥을 도모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그는 ?州(四川省 ?峽)로 유배되고 이에 관련된 유민은 河南과 ?右의 여러 주로 다시 강제 이주되었음을 전해주고 있다. 이 사건을 가-①을 포함한 대부분의 기록에서는 677년 보장왕이 요동으로 귀환한 사실에 뒤이어 서술하였기 때문에,10) 그가 말갈과 모반을 꾀한 시점이 구체적으로 언제인지 알 수 없다. 그런데 가-②에 의하면 보장왕은 681년 소환되어 ?州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사망하였기 때문에, 이 사건의 하한은 681년이 된다.


  보장왕을 견제하기 위하여 안동도호부에 파견된 男生은 679년 5월 29일 사망하였다.11) 한편 630년 멸망한 突厥은 이무렵부터 당의 기미지배에 반발하기 시작하였다. 즉 679년 10월 돌궐은 定州를 침입하는 한편, 奚와 契丹을 선동하여 營州를 침략하였던 것이다.12) 이 무렵 남생의 아들 泉獻誠은 喪中임에도 불구하고 定襄軍討叛大使에 임명되어 출정한 것은13) 이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보장왕은 내부적으로 남생의 사망과 대외적으로 돌궐 및 해와 거란의 침략을 기회로 고구려의 부흥을 도모했던 것이다.


  그러면 보장왕이 통모한 靺鞨에 대해 살펴보자. 말갈은 隋唐代에 고구려의 병력으로 참전하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고구려 멸망 이후에 말갈은 당군에 편입되어 羅唐전쟁에 동원되었지만, 고구려 유민과 함께 반당투쟁에 나선 경우도 있었다.14) 문제는 보장왕이 통모한 말갈의 실체인데, 선행 연구에서는 이에 대해 요동지역에 근접한 粟末靺鞨일 가능성을 지적하였다.15) 고구려 멸망 이후에 다른 靺鞨諸部가 해체된 데 비해 속말말갈은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점에서16) 이들은 여전히 세력을 유지하였을 것이며, 반당투쟁에 나섰던 고구려 유민들의 일부가 이곳으로 흘러 들어갔을 가능성도 높다.17)


  보장왕과 말갈의 통모는 사전에 발각되어, 보장왕과 이에 관련된 자들은 다시 당 내지로 강제 이주되었다. 그 결과 貧者들만이 安東城 즉 안동도호부의 治所 근처에 남았다는 점에서 강제 이주의 규모는 컸다고 짐작되며, 강제 이주된 자들은 아마도 보장왕과 함께 귀환했던 고구려 유민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보장왕은 고구려 유민을 규합하고 나아가 말갈과 통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모반은 사전에 발각되었고, 이 점에서 요동지역의 기미지배를 통제하기 위해 안동도호부를 신성으로 이동시킨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고구려 멸망 직후 男生이 당으로부터 받은 卞國公?食邑 3,000戶의 지위를 泉獻誠이 계승한 것은 바로 이 해였다.18) 어쩌면 천헌성은 보장왕의 시도를 사전에 파악하고 무력화시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2. 大祚榮 集團의 營州 徙居    


  보장왕이 고구려 부흥운동을 시도하였다가 실패한 결과 고구려 유민의 강제 이주가 이루어졌면, 안동도호부의 지배력이 미치는 범위에서 그와 통모하였던 속말말갈의 경우도 강제 이주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신라측 기록에는 이때 대조영과 걸사비우가 강제 이주되었음을 전하고 있다.   





나-① (崔致遠) 文集의 太師侍中에게 올리는 狀啓에서 말하기를 “… 摠章 원년(668) (高宗이) 英公 徐勣에게 高句麗를 격파하고 安東都督府를 설치하도록 명하였습니다. 儀鳳 3년(678)에 이르러 고구려 유민을 河南??右로 옮기니, 나머지 고구려 유민들이 모여 북쪽으로 太白山 아래 의지하여 국호를 渤海라고 하였습니다”19)


   ② 三國史에 이르기를 “儀鳳 3년 高宗 戊寅年에 나머지 고구려 유민들이 모여 북쪽으로 太伯山 아래 의지하여 국호를 渤海라 하였다”고 한다. … 또 新羅古記에 이르기를 “고구려의 옛 장수 祚榮은 大氏인데, 패잔병들을 모아 太伯山 남쪽에 나라를 세워 국호를 渤海라 하였다”고 한다.20)


   ③ 신이 삼가 渤海의 源流를 살펴보겠습니다. 고구려가 멸망하지 않았을 때는 (발해는) 본래 사마귀나 혹 같은 조그만 부락이었습니다. 말갈의 부류가 이에 번성하여 무리를 이루었습니다. 이에 粟末小蕃이라 불렀는데 일찍이 고구려를 좆아 (唐 內地로) 옮겨왔습니다. 그 首領 乞四比羽 및 大祚榮 등이 則天武后가 조정을 다스릴 때 營州에서 난을 일으켜 달아나 황페한 언덕에 의지하여 비로소 振國이라 칭하였습니다.21)





  사료 나-①은 崔致遠이 唐의 太師侍中에게 보낸 狀啓에서 발해의 건국에 대해 언급한 구절이다. 나-②에서 인용한 三國史는 그 내용이 동일한 나-①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678년 고구려 유민의 강제 이주 과정에서 고구려 유민들이 발해를 건국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이는 발해가 李盡忠의 亂(696) 이후에 건국되었다는 다른 기록들과 배치된다. 최근에는 이 678년에 주목하여, 이때를 698년에 건국한 발해황제국에 선행하는 震國이 건국된 시점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22) 그러나 최치원의 또다른 글인 사료 나-③에서는 진국의 건국이 則天武后 시기에 영주에서 발발한 이진충의 난 이후임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견해는 따르기 어렵다.


  그런데 사료 나-①과 ②에서 말하는 儀鳳 3년(678)은 儀鳳 2년(677)의 誤記로 파악된다. 앞에서 보았듯이 보장왕이 말갈과 통모한 결과 당이 고구려 유민들을 다시 강제 이주시킨 사실이 다른 기록에는 儀鳳 2년조에 이어서 일괄적으로 서술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보장왕은 681년 ?州로 유배되었기 때문에 실제로 고구려 유민들이 강제 이주된 시점도 681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사건은 보장왕으로 대표되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의 공모에 의한 것이므로, 강제 이주의 대상은 고구려 유민만이 아니라 말갈도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사료 나-③에서 속말말갈이 고구려 유민을 좆아 당 내지로 이주하는 과정에서23) 營州에 머무르게 되었고 그 수령은 乞四比羽와 大祚榮임을 밝히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었다.


  대조영 등의 강제 이주 시점에 대해서 다른 기록들에는 단지 고구려 멸망 이후라고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기존의 연구에서도 대체로 고구려 멸망 직후 행해진 669년의 강제 이주로 파악하였다.24) 그러나 사-①과 ②에서는 669년의 강제 이주를 언급하지 않고, 678년의 강제 이주를 언급하였다.


  이 사실은 모두 외교문서에 기록된 것이므로, 신라측 나름의 근거하에 작성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사료 나-③에서는 뒤이어 발해가 건국 직후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였을 때 신라에서는 대조영에게 大阿?을 제수하였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25) 어쩌면 이때 발해의 사신이 전한 발해 건국의 내력을 최치원이 보고 작성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678년은 발해의 건국 시점으로 볼 수는 없더라도, 발해인에게 반드시 기억해야할 연도이기 때문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678년은 발해의 건국집단에게 중요한 역사적 사건, 즉 營州로 강제 이주된 시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또 하나의 사실은 사료 나-②의 新羅古記에서는 大祚榮이 高句麗의 舊將이라고 한 데 반해, 사료 나-③에서는 대조영을 粟末靺鞨의 首領이라고 한 점이다. 이는 발해사의 기본 사료인 舊唐書와 新唐書에서 각각 대조영의 出自를 ‘高麗別種’과 ‘高句麗에 예속된 粟末靺鞨’로 각각 달리 기록한 것과 유사하다.26) 이처럼 대조영의 출자에 관한 서로 다른 기록은 발해사의 귀속 문제와 관련되어 많은 논란이 있었다. 기존에 이 문제에 대해 한국사의 입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향에서 접근하였다.


  하나는 고구려와 말갈의 종족 계통을 같다고 보는 견해이다. 사실 北流 松花江을 중심으로 그 以東의 넓은 지역에 분포한 이른바 靺鞨 7部가 모두 종족 계통이 같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粟末靺鞨과 白山靺鞨의 경우 고구려에 군사적으로 동원되었던 점은 양자간의 종족적 차이가 그다지 크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즉 3세기 무렵 고구려에 복속되었던 東濊나 沃沮의 후예가 5세기 이후 말갈로 표현되어 고구려에 군사적으로 동원되었다는 사실은 이를 반증한다. 특히 隋書 靺鞨傳에서는 말갈 7부 가운데 拂涅 以東은 石鏃을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拂涅 以西 지역과 구분하고 있다. 石鏃 사용 여부는 말갈제부의 종족적 차이를 반영한다고 보아, 이를 근거로 전자를 ?婁系 靺鞨, 후자를 濊系 靺鞨로 구분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27) 이러한 견해는 나아가 靺鞨을 고구려 변방의 피지배층 일반을 가리키는 汎稱 내지 卑稱으로 보고, 大祚榮과 乞四比羽는 각각 粟末水(송화강)와 白山(백두산) 지역의 고구려인으로 파악하기 때문에,28) 대조영의 출자에 관한 상이한 기록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편 속말말갈과 고구려의 종족계통이 다르다는 통설에 따르는 입장에서는 일단 石鏃 사용 여부는 말갈제부 내에서의 철기문화의 보급도와 농경화의 정도에 따른 문화적 낙차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오히려 고구려가 영역국가로서 확대되는 과정에서 종족간의 융합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粟末水와 같이 고구려인과 말갈족이 인접해 있는 경우에는 高句麗系 邊境民과 高句麗化된 靺鞨系 住民을 상정할 수 있다. 그런데 大祚榮과 달리 乞四比羽는 말갈로만 기록되어 있는 점에서, 대조영은 고구려계 변경민, 걸사비우는 고구려화된 말갈족으로 파악된다.29) 근래에는 이 견해의 연장선상에서 歸屬意識을 감안하여 대조영을 靺鞨系 高句麗人으로 보고, 대조영 집단은 이미 조상대인 6세기말 전후에 고구려로 들어왔다고 보고 있다.30)


  이 두 가지 견해는 고구려와 말갈의 종족 계통에 대한 기본적인 관점은 서로 다르다. 그런데 말갈은 종족 개념이지만, 고구려에는 종족 개념과 국가 개념이 중첩되어 있다. 따라서 종족 개념으로서의 고구려인은 濊貊 계통의 原高句麗人이 주축을 이루겠지만, 고구려 국가에는 원고구려인과 함께 말갈족도 포함되어 있다.31) 이 점에서 두 견해는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32)


  대조영의 출자에 관해서는 그가 강제 이주된 곳이 營州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669년이나 681년의 강제 이주에서 고구려 유민의 최종 목적지는 河西??右 등 唐 內地인 데 반해 대조영과 걸사비우 등은 그 경유지인 영주에 머물렀던 것이다. 營州는 당의 동북방면의 전진기지로서 이곳에는 주로 契丹이나 靺鞨이 거주하였다. 거란의 경우 松漠都督 李盡忠과 함께 난을 일으킨 契丹人 孫萬榮은 曾祖 이래로 영주에 거주하였고,33) 말갈의 경우 隋代에 粟末靺鞨의 突地稽 집단, 唐初에는 烏素固 부락이 고구려의 압박을 피해 귀속한 이래로 唐代까지 영주에 거처하였다. 이들은 遊牧 또는 半農半獵 생활을 통해 집단적으로 거주하였기 때문에, 당은 이곳에 집중적으로 羈?州를 설치하였다.34) 또한 고구려 멸망 이후 대부분 당으로 강제 이주되었던 白山靺鞨의 경우도 영주에 집단적으로 거주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고구려 유민의 경우는 이와 달랐다. 고구려 유민들을 내지로 강제 이주시킨 데에는 이들이 農耕民이라는 점도 작용하였겠지만,35) 만약 이들이 營州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었을 경우 반란이 일어나고 여기에 말갈까지 결합하게 된다면, 이는 곧바로 요동 지역에까지 파급이 미쳐 안동도호부 자체가 붕괴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멀리 내지로 강제 이주시키되 집단배치를 피하고 분산 배치하였던 것이다. 물론 영주가 경유지라는 점에서 두 차례의 강제 이주 과정에서 고구려인이 잔류하기도 하였을 테지만, 미미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대조영이 ‘발해말갈로서 고려별종’으로 표현되거나 ‘고구려에 예속된 속말말갈’로 표현되는 것은 영주에 거주하게 된 사실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다만 乞四比羽의 경우 고구려와의 관련성 없이 靺鞨로만 표현되었다는 점에서,36) 양자간에 어느 정도 종족적 차이는 부인할 수 없다. 이 점에서 신라측 기록에서 대조영을 고구려의 舊將이라는 기록을 신뢰한다면, 그는 반당투쟁의 실패 이후 속말말갈 지역으로 간 고구려 장수일 가능성이 높다.





  3. 李盡忠의 亂과 安東都護府


  營州에는 거란족과 말갈족, 그리고 고구려인 등이 잡거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696년 5월 松漠都督 李盡忠이 營州都督 趙?의 학정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영주를 점령하였다. 그 배경으로 687년 돌궐의 부흥에 따라 당의 북방 기미체제가 전면적으로 붕괴된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37) 이는 당 내부에서 高宗 사후 則天武后가 권력을 장악하며 대외정책에 소극적이었던 점과 무관치 않다. 이진충의 난은 이후 河北 지방을 중심으로 4년간 지속되었다. 이진충의 난이 기본적으로 기미지배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영주에 거주하던 다양한 종족들도 이에 가세하였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발해가 건국되었다. 먼저 이진충의 난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38)


  696년 5월 營州의 契丹人 松漠都督 李盡忠과 歸誠州刺史 孫萬榮이 거병하여 영주를 함락하고, 8월에는 平州(河北省 盧龍)의 ?石谷에서 唐軍을 대패시킨 뒤 軍牒을 위조하여 당군을 유인하여 재차 전몰시켰다. 이로써 당은 동북 방면의 지배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9월 降戶 반환을 조건으로 당과 밀약한 突厥이 거란의 배후를 습격함으로써, 이진충이 사망하는 등 일시적으로 거란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그러나 孫萬榮이 이를 수습하여 697년 3월 東?石谷에서 당군을 대패시키고 幽州로 진격하였다. 이때 손만영은 배후를 걱정하여 突厥의 ??可汗에게 유주 공격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이 제안은 오히려 거란의 약점을 돌궐에게 노출시켜, 6월 돌궐과 당의 공격으로 거란은 크게 격파되었고 손만영도 사망하였다. 이로써 이진충의 난은 일단락되었지만, 거란 잔당은 요동 지역에서 여전히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여기에는 대조영과 걸사비우도 포함되어 있었다. 거란의 降將 李楷固가 이를 토벌하고 개선한 것이 700년 7월이었다. 


  여기서는 발해 건국의 배경을 살펴본다는 점에서 이진충의 난이 요동 지역에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안동도호부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다-① 신은 듣건대 宗懷昌 등의 군대가 전세가 불리하게 된 것은 바로 역적들이 관군의 문서를 위조하여 懷昌을 불렀기 때문입니다. 昌등은 어리석어 대비없이 함몰되었습니다. 지금 諸軍이 실패한 것은 東蕃[거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安東은 가로막혀 이 속임수를 자세히 알지 못할 것입니다. 국가가 안동과 私契로 안동과 왕래함이 없다면 신은 凶賊이 다양하게 속임수를 벌일까 두렵습니다. 만약 거짓 명령에 속아 다시 (이들을) 도모(할 기회)를 상실한다면 이는 적들의 권세를 도와주어 安東都護府가 함락될 것입니다. … 또 적이 처음 승리하고도 곧바로 서쪽으로 침략하지 않은 것은 安東을 공략하여 스스로 안전케 하려는 계책입니다. 만약 안동이 공략당한다면 요동 지역은 나라에서 제어할 수 없게 됩니다.39)





   ② 萬歲通天 원년(696) 9월 丁巳 突厥이 ?州를 침략하여 都督 許欽明을 사로잡았다. … 欽明의 형 欽寂은 이때 龍山軍討擊副使로서 契丹과 崇州에서 싸우다 패하여 사로잡혔다. 적들이 安東을 포위하며 欽寂으로 하여금 휘하 성 중에 항복하지 않은 자들을 설득하게 하였다. 安東都護 裴玄珪가 성중에 있으니, 欽寂이 “적들에게 하늘의 재앙이 내려 (이들이) 멸망할 날이 아침 아니면 저녁일 것이다. 공은 군사를 독려하여 (성을) 잘 지켜 충절을 다하라”하니, 적들이 그를 죽였다.40)





   ③ 淸邊道大總管 建安郡王 攸宜는 遼東州 高都督 蕃府에 편지를 보낸다. 賢甥 아무개가 와서 역적 孫萬斬을 맞이하여 십여 진영을 격파하고 오랑캐 1,000명을 사로잡았다는 소식을 알게 되니, 전군이 축하하고 통쾌하게 여기며 만리 떨어진 곳에서도 함께 기뻐하였다. 都督이 … 수백의 군사로 二萬의 침략을 막아내는 데 신속하게 지휘하니 逆黨이 구름처럼 사라졌다. … 某月 某日에 모든 길로 함께 진격할 때, 5萬의 蕃漢精兵을 나누어 中郞將 薛訥로 하여금 海路로 동쪽으로 들어가게 할 계획이다. 전함이 이미 갖추어졌으니 다음달 출발할 터이니, 청컨대 都督도 무기를 단련하고 말을 배불리 먹여 이때를 기다리라. … 초봄이 점차 따뜻해지니, 원컨대 건강하라.41)





  사료 다-①은 李盡忠이 영주를 함락한 직후 696년 8월 平州의 ?石谷에서 軍牒을 위조하여 당군을 연파한 뒤 쓰여진 글이다. 이 글은 淸邊道行軍大總管 武攸宜의 참모로서 각종 문건을 담당한 陳子昻이 썼기 때문에, 당시의 정황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이에 따르면 당은 거란이 서쪽으로 ?河를 건너 幽州로 진격하지 않고 동쪽으로 요동지역을 공격할 것을 우려하였다.


  사료 다-②에서는 9월 突厥의 凉州 침략과 거의 같은 시기에 거란이 안동도호부를 공격하였음을 전하고 있다. 안동도호부는 677년 이래로 新城에 있었기 때문에42) 영주에 근거를 둔 이진충의 거란군에게 배후의 위협이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는 공격의 결말을 전하지 않지만, 안동도호부가 포위될 정도라면 요동 지역도 크게 전란에 휩싸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진충의 사망 이후 일시 위축되었던 거란은 손만영을 중심으로 세력을 회복하여 다시 하북을 공격하였다. 이듬해 697년 정월에는 돌궐이 당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즈음 거란도  다시 요동지역을 공격하였다가 패하였음을 사료 다-③은 전해준다. 손만영은 697년 6월 사망하였으므로 말미에 보이는 初春은 697년 봄을 가리킨다.


  여기에 등장하는 遼東州 高都督은 遼東都督 高仇須를 가리킨다.43) 遼東州는 安東都護府 예하의 羈?州이므로 都督 高仇須는 高句麗人이다.44) 그런데 여기서 승전보와 향후 전술이 안동도호부를 통하지 않고 遼東都督과 淸邊道大總管간에 직접 전달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안동도호부가 기미주를 총괄하는 기능을 상실하였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696년 9월 안동도호부가 공격받은 이후 요동 지역은 거란의 공격에 대해 기미주 단위로 독자적으로 방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淸邊道大總管 建安郡王 武攸宜이 中郞將 薛訥이 이끄는 5만군을 海路를 통해 요동지역으로 파견하려고 한 것은 이미 거란에 의해 육로가 폐쇄되었기 때문이었다.


  고구려 출신의 高文?高慈 부자는 697년 5월 23일 磨米城(지금의 遼陽과 瀋陽 부근)에서 전사하였는데,45) 이는 설눌의 출정에 따라 나섰기 때문으로 보인다.





  4. 大祚榮 集團의 動向


  그러면 이제 이진충의 난이 요동으로 전개되는 과정에서 營州에 거주하던 대조영과 걸사비우 집단의 동향에 대해 살펴보자.





라-① 萬歲通天年(696)에 契丹 李盡忠이 반란을 일으키자, 大祚榮과 靺鞨 乞四比羽가 각각 무리를 이끌고 동쪽으로 달아나 험준한 곳을 지키며 스스로 방비하였다. 李盡忠이 죽자 則天武后는 右玉鈐衛大將軍 李楷固에게 (이진충의) 잔당을 토벌케 하였다. (이해고는) 먼저 乞四比羽를 격파하여 참하고, 다시 天門嶺을 넘어 大祚榮을 압박하였다. 大祚榮은 고구려 유민과 靺鞨의 무리를 규합하여 李楷固에 항거하니, 당의 군대가 대패하고 이해고만 몸을 빼어 귀환하였다.46)


   ② 萬歲通天에 이르러 契丹 李[孫]萬榮이 반란을 일으켜 營州都督府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때) 高麗別種 大舍利 乞乞仲象과 靺鞨 反人 乞四比羽가 달아나 遼東을 지키며 高句麗 故地를 나누어 다스렸다. 則天武后는 乞四比羽를 許國公, 大舍利 乞乞仲象을 震國公에 봉하였으나, 乞四比羽가 왕명을 받지 않았다. 則川武后가 장군 李楷固에게 출정케 하니 (이해고가 걸사비우를) 참하였다. 이때 걸걸중상은 이미 죽어 아들 대조영이 계승하여 걸사비우의 무리까지 병합하였다.47)





  위 사료는 이진충의 난이 발발한 이후 대조영과 걸사비우가 각각 무리를 이끌고 요동에 일차 정착하였고, 이해고의 토벌을 받아 걸사비우가 패사하자 대조영이 무리를 규합하여 天門嶺에서 이해고를 격파하기까지의 과정을 전하고 있다. 사료 라-①에서는 전과정을 大祚榮이 乞四比羽와 함께 주도한 것으로 나오고 있다. 반면 라-②에서는 요동에 정착할 때까지는 대조영의 아버지인 乞乞仲象이 주도하였을 뿐 아니라, 그가 거란의 관직인 舍利를 지니고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전자가 발해와의 교섭에 대한 당의 공식 기록인 데 반해, 후자는 835년 발해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張建章이 남긴 渤海國記에 의거한 것으로 파악된다.48) 渤海國記는 장건장이 직접 발해에서 견문한 바를 기록한 것이므로 사료적 가치가 높다. 따라서 이를 근거로 한 사료 라-②에서 전해주는 새로운 내용은 9세기 발해인의 인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걸사비우의 패사 직전까지 고구려 유민을 이끌었던 이는 대조영이 아니라 걸걸중상이다. 그런데 걸걸중상은 舍利라는 거란의 관직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당은 걸걸중상과 걸사비우를 거란 잔당으로 파악하여 토벌군을 파견하였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진충의 거란군은 세차례 요동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걸걸중상과 걸사비우가 요동으로 건너갔던 사실은 거란군의 요동 공격에 이들이 참여하였음을 의미한다.


  사료 라-②에서는 乞乞仲象과 乞四比羽가 遼東의 高句麗 故地에서 각각 왕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는 697년 6월 손만영의 사망 이후 거란이 와해되면서 요동지역의 공격에 참가했던 걸걸중상과 걸사비우가 독자세력을 이루었음을 의미한다. 이에 당은 각각 震國公과 許國公으로 임명하였으나, 걸사비우의 거부로 결국 이들을 토벌하게 되었다.


  이때 당의 회유책에 대해 걸사비우는 거부한 반면 걸걸중상은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은 것으로 파악된다. 이렇게 본다면 때문에 발해의 건국 과정에서 초기에는 걸사비우가 이끄는 말갈족이 주도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49) 그러나 이 기록이 기본적으로 9세기 발해인의 인식이었다는 점에서 볼 때, 발해는 친당노선이 건국초부터였음을 드러내기 위해 대조영은 친당적이었고, 걸사비우는 대당강경파였음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이런 표현이 나왔을 가능성도50) 배제할 수 없다. 어쨌든 회유와 무마가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당은 李楷固를 파견하여 거란 잔당인 이들을 토벌케 하였다.


  李楷固는 697년 6월 손만영 사후 당에 항복하였으므로 그가 걸사비우를 토벌한 시기는 이 이후이다. 이해고가 거란 잔당 토벌을 끝내고 개선한 것은 久視元年(700) 7월이었다.51) 따라서 이해고가 걸사비우를 패사시키고, 천문령까지 대조영 집단을 추격한 것은 700년 7월 이전이 된다. 이에 근거하여 발해의 건국도 초기 연구에서는 이즈음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일본측 기록에 따르면 발해의 건국은 698년이므로,52) 이해고의 토벌은 698년 무렵이고, 700년 7월의 개선은 이와는 별개의 사안이다. 즉 697년 6월 이후 당은 요동 지역의 안정을 위하여 우선 독자세력을 구축한 걸걸중상과 걸사비우 등에 대해 회유 정책을 구사하다가, 698년 무렵 이들을 토벌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회유에서 토벌로 방침을 전환한 것은 어느 때일까.





마-① 神功 원년(697) … (狄)仁傑이 백성들이 서쪽으로 疏勒 등 4鎭을 지키느라 몹시 피폐해지자, 이에 상소하여 말하기를 “… 근래 국가에서 해마다 출정하니 비용이 자꾸 늘어납니다. 서쪽으로 四鎭을 지키고 동쪽으로 安東을 지키니 세금 징수가 날마다 늘어나 백성들이 피폐집니다. … 신의 견해로는 청컨대 四鎭을 버려서 국중을 살찌우고 安東을 파하여 遼西를 충실히 함으로써, 먼 지방에서 군비를 줄이고 변경에서 무기를 버리십시오. … ”하였다. 仁傑이 다시 安東을 폐지하고 高氏를 君長으로 삼아, 江南의 물자 수송을 중단하고 河北의 노고와 피폐를 위로하면 몇 년 뒤에는 인민을 평안히 하고 나라를 부유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요청하였다. 일이 비록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식자들은 (적인걸의 의견이) 옳다고 여겼다.53)


   ② 垂拱 2년(686) 다시 高藏의 손자 寶元을 朝鮮郡王에 봉하였고, 聖曆 원년(698) 左鷹揚衛大將軍을 제수하고 忠誠國王에 봉하여 안동도호부 관할하의 고구려 유민의 통치를 맡겼으나, 일이 끝내 실행되지 않았다.54)





  사료 마-①에서 697년 狄仁傑은 안동도호부를 폐지하고, 고구려 왕족에게 요동 지역의 통치를 위임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안동지역의 빈번한 출병 때문이었는데, 그 대상은 요동 지역에서 독자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乞乞仲象과 乞四比羽를 포함한 거란 잔당이었다. 적인걸의 주장은 마-②에서 보듯이 698년 보장왕의 손자 高寶元을 忠誠國王에 임명하고 요동 지역의 통치를 위임하는 것으로써 일단 채택되었으나, 끝내 실행되지는 않았다.


  이는 걸사비우가 당의 회유를 거부한 것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안동도호부를 폐지하고 高寶元을 忠誠國王에 임명하려는 계획이 실행되려면 걸걸중상과 걸사비우가 당에 귀순하는 것이 전제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은 이들을 각각 震國公과 許國公에 봉하였으나, 걸사비우가 당의 회유를 거부함으로써 이러한 구상은 실행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安東都護府는 698년 6월 都督府로 축소되고 遼東都督 高仇須가 安東都督에 임명되었다.55) 따라서 고보원을 충성국왕에 임명하고 걸사비우와 걸걸중상을 회유하려는 계획은 698년 초반에 수립되었고, 걸사비우의 거부에 따라 이해고의 토벌은 이즈음에 실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698년 6월 돌궐과 당의 혼담이 깨지고, 9월 당은 돌궐 토벌을 위해 狄仁傑을 河北道行軍副元帥로 임명함과 동시에 薛訥을 安東道經略에 임명하였다.56) 이미 요동에서는 이해고가 거란잔당 토벌의 일환으로 걸걸중상과 걸사비우를 공격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해고는 걸사비우의 토벌에는 성공하였으나, 걸사비우 사후 그 무리까지 규합한 대조영을 토벌하는 데는 실패하고 오히려 대패하였다. 이는 요동지역에서 전세가 악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698년 9월 설눌의 원정은 이해고에 대한 지원의 의미를 띠고 있었던 것이 된다.57)


  대조영 집단이 천문령 전투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牡丹江 유역의 東牟山까지 이동하였던 까닭은 이 때문이었다. 이때 설눌의 지원을 받은 이해고가 대조영 집단을 끝까지 추적하지 못한 것은, 당시 거란이 돌궐에 복속하여 교통이 두절되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해고의 토벌은 다시 요동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한편 이즈음 거란 추장 李楷洛이 700년 당에 항복한 후 등용되어, 압록강 일대에서 靺鞨을 섬멸하고 楡關 이북에서 契丹을 소탕하였다.58) 압록강 일대에서 섬멸된 말갈은 어디로 갔을까. 천문령 전투 승리 후 말갈의 무리와 고구려의 유민이 차츰 대조영에게 귀속하였다는 것은 이와 관련되는 것으로 파악된다.





  맺음말


  이제 당의 지배영역의 축소 과정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처음 당은 안동도호부의 설치와 함께 고구려 고지 전체를 기미주로 편제하고 영역화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677년 이후 안동도호부의 요동 퇴각에 따라, 지배영역은 요동지역으로 축소되고, 지배방침도 간접통치로서의 기미지배로 전환하였다. 681년 보장왕의 모반이 실패한 것은 안동도호부의 기미지배가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696년 이진충의 난이 요동까지 미치면서 안동도호부는 휘하의 기미를 통제하는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따라서 발해의 건국집단이 요동에서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다. 당이 이들을 회유하는 한편 698년 안동도호부를 폐지하고 보장왕의 손자 高寶元에게 요동통치를 위임하려고 하였다. 발해의 건국집단이 이를 거부하자, 당은 발해의 건국집단의 토벌에 나섰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발해의 건국집단은 요동지역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동주함으로써, 결국 안동도호부가 도독부로 축소되었다. 이에 따라 요동지역은 기미주 단위의 자치 상태로 넘어가게 되었다. 도호부의 철폐라는 차원에서 결국 당은 요동 이동의 고구려 고지를 공식적으로 포기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잠시 발해 건국을 전후한 말갈이라는 표현에 대해 살펴보자. 말갈은 고구려의 동북방면의 넓은 지역에 거주하던 다양한 종족들의 총칭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말갈은 독자적인 국가체를 형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고구려에 예속되거나 영향력하에 있었다. 즉 말갈은 고구려보다 사회발전 단계에서 뒤진 존재였던 것이다. 이 점에서 말갈이라는 종족명에는 멸시나 야만의 의미를 담은 卑稱으로도 사용되었음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말갈제부 가운데 속말말갈이나 백산말갈 같이 고구려에 예속된 말갈도 존재하였다. 즉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포함할 때 고구려 세력권이라는 개념을 상정할 수 있다. 고구려 멸망 이후 발해까지 당의 동북방면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기록을 남긴 것은 당이었다. 이러한 기록을 남긴 당의 지배층의 인식에서는 고구려 세력권 가운데 당 내지로 끌려간 고구려인이나 안동도호부의 통치하에서 기미지배에 편입된 고구려인과 이에 반발하여 독자 세력을 이룬 고구려 세력권과 구분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또한 요동지역에서 기미지배에 편입된 고구려유민, 특히 천남생이나 천헌성은 반당투쟁에 참여한 고구려 유민이나 발해의 건국을 어떻게 생각하였을까? 어쩌면 이들은 자신은 정통 고구려인, 반면 저들은 미개한 말갈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