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휴가

 

5.18 광주민주화 운동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내가 중학교 3학년때인 95년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때 처음 들은 정식 명칭은 ‘5.18 광주 사태’였다. 당시 홀로 초등학교에서 튕겨나와 친구 없이 진학했던 중학교에서 내게 유일한 낙이었다면 1학년때 담임선생님이 매번 내는 독서 대회였다. 당시 내가 읽었던 책은 아직도 나의 독서량 중 10%이상은 더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중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여자 국어 선생님이셨는데 (나는 대대로 국어선생님은 참 잘만나는 듯 싶다. 내 인생에 화려한 획은 그어주신 국어 선생님이 중학교 한분, 고등학교 두분, 대학교 한분, 4분이 계신다.) 비행하는 청소년을 어떻게 다루어야하는지 아주 이골이 나신 분이셨다.

어느날 담임선생님이 나를 불러서는 독서와 연관한 발표 수업에서 책 한권을 주시더니 이것에 대해 발표했으면 한다고 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 책은 외국인이 쓴 ‘5.18 광주 사태’라는 책이었는데 아직까지 나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사진이 두장 있다. 그것은 팬티만 입은채 피를 흘리는 젊은 남자와 여자들이 군인들에게 몽둥이를 맞으며 끌려가는 사진이었고 또다른 한장은 헬기에서 기관총으로 총을 쏘아대던 장면이었다. 당시는 5.18 이후 15년이 흘렀지만 그때까지도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관련 책자도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오히려 명칭도 광주 사태였으며 내가 그 책에 대한 발표를 했을 때에도 수많은 학생들이 믿지 않았다.
 
나는 그 사건이 진실로 있었다고 믿게 된 것이 당시 육군 대위이셨던 아버지의 증언에서였다. 아버지가 장교 출신이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께 사건의 존재 여부를 묻기 위해 그 책을 들고 갔을때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그 사건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당시 나는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는데 5월이면 한창 배가 불러오던 시기였다고 한다. 어머니께서 더위를 잘 타셨고 체격도 약하셨기 때문에 아버지께서는 어머니를 늘 걱정하셨다고. 당시 ‘부마사태’와 더불어 ‘전두환’의 쿠데타 등으로 정국이 혼란하던 시기. 군인들이 전국에 민간 시설에 주둔하기 시작해서 데모가 끊일 날이 없었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저녁 늦게 전화를 해서는 마산의 어머니 친가에서 절대 나오지 말라고 말하고는 당시 말씀으로는 교통통제를 하셨다고 했다. 아버지께서는 당시 광주에서 무슨 사태가 벌어졌는지 자신쪽으로는 자세한 정보는 없었지만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났는데 전쟁과 다를 바 없다는 소식과 아무도 광주로 들어갈 수도 없으며 또 그쪽으로 향하는 모든 교통을 통제하라는 식의 소식이 전부였다고 한다. 이후 광주 운동이 끝나고 밝혀진 내용은 내가 책과 이후 여러 매체를 통해 들은 내용과 같다. 내가 부모님께 그 책을 보여드렸더니 아버지께서는 아무말씀 없으셨고 어머니께서는 당시 아무런 소식 없이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랬던 때라고 하시면서 책의 사진들을 보시더니 경악을 금치 못하셨다. 아버지께서는 결국 81년에 제대를 하시고 회사에 취직하셨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도 의문이 드는 것은 95년 당시에도 부모님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광주 민주화 운동의 내용이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은 것은 정말 놀라웠다. 게다가 지금도 그런 사실을 모르는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역사는 반복되고 역사가 주는 교훈 만큼 가치 있는 것이 없음을 볼 때 이러한 상황이 가져다 주는 우리의 모습은 정말 비참하기 그지 없다. 사회정의를 부르짖으면서도 역사의 정의는 침묵하는 가운데 대중과 정치와 언론의 세박자 침묵은 그야말로 사건을 무마하기 위한 전국민적 합의이다. 무지는 죄다. 그런 의미에서 당시 무관심하던 사람들의 무지. 그것이 지금까지도 우리의 무지로 이어져 왔다는 사실이 부끄럽기만 하다.

영화 <화려한 휴가>는 그런 시대의 흐름을 반영한다. 당시의 시간 순서로 언급하며 적절한 가상의 스토리를 첨부한 영화는 영화로서 그다지 가치도, 뛰어남도 없지만 역사의 이야기 하나만으로도 충분이 주목받을 가치가 있고 또 영화사에 있어서 중요한 작품이 될 것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몇백만 관객들이 영화를 보는 내내 그 시대의 현장 속을 얼마나 관심있게 보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가 사건의 나열에 그친 것은 그러한 의식의 방조에 어느정도 기인할 듯 보인다. 중요한 건 영화화가 아니라 역사의 정의이다. 사건의 재구성, 반복, 증명은 충분히 지속적으로 되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역사이며 사실임이 밝혀진 것과 마찬가지로 피해자와 제3자가 모든 것을 인정하고 사실로서 서술하면서도 단순히 재구성과 반복, 증명의 나열에만 그치고 있다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역사의 정의는 침묵하지 않는다. 재구성과 반복, 증명은 충분하다. 이제 부끄러운 사실을 인정하고 모든 것을 사과하는 가해자와 역사로서 심판하는 능동적 심판의 시기만 남았다. 그대여. 스스로 무지를 뛰어넘고 역사의 심판에 서명할 때가 아닌가.